“정체의 시대에 만난 예수”
(7. 5. 2015)
한국은 특별한 기독교의 부흥을 경험한 국가다. 그래서 중년 이상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복 주셔서 이 나라가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한국교회가 이 나라를 살린 것이라고, 교회 열심히 다녀야 한다고 자부심 있게 말한다. 하지만 그 부흥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는 그 말에 시큰둥하다. “당신의 경험을 나에게도 강요하지 마세요.”
한국은 장년층과 청년층 모두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다. 장년층은 나라의 성장, 교회의 성장, 개인의 성장을 동시에 경험한 세대이다. “번영의 신학”을 몸으로 느낀 사람들이다. 대충 기도해도 사업이 잘 되고, 취업이 잘 되고, 가정이 잘 되었다. 신앙이란 기쁨이었고, 큰 고민이 필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나니 번영이 아닌 정체가 왔다. 삶에 위기가 왔다. 똑같이 시작했던 김집사 집안은 잘 나가는데, 우리 가정은 계속 정체되기 시작한다. 가정만 문제인 줄 알았는데 학교도, 직장도, 나라도 뭔가 정체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정체된 삶에도 함께하시는가? 그런 고민을 해 본적이 없어서 혼란스럽다. 그 혼란 속 가장들에게 교회는 너무나 가벼운 “God bless you”를 외치고 있다.
젊은이들은 어떤가? 믿지 않는 청년들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새마을운동처럼 생각한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인 집단행동이었을 뿐이라고 여긴다. 기존 기독교인들은 그런 ‘버릇없는’ 젊은이들이 불쾌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마귀 자식들!” 그러나 믿지 않는 청년들에게도 그 말이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믿었던 청년들도 공허하다. 교회에 다니긴 했다. 그런데 20살이 넘으니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부모를 따라 교회에 가기엔 나의 커리어와 인생이 너무 정체되어 가는 듯하다. “내가 여기서 왜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인가?” 직접 고민하고 의심하는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데, 교회와 부모에게 늦게나마 그 질문을 하면 어이없는 협박을 받는다. “예배 드려야 복 받아! 예배 떠나면 저주 받아!” 전수만 받은 신앙은 그래서 위험하다.
아주 오래 전, 동일한 신앙의 고민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사도 요한이다. 그 시대에 많은 엘리트들이 그를 따랐으니, 나름 잘 나가던 인생이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회를 소란스럽게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인생의 정체가 시작되었다. 요한은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게 된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태복음 11장 3절) 무슨 말인가? “내가 평생 예수 당신을 위해서 살았는데, 마지막이 감옥행이라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모든게 사기 아닙니까? 예수님이 내가 생각했던 그 분 맞습니까? 혹시 내가 당신을 너무 과도하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요한은 열심히 교회를 다녔던, 한 때 인생이 잘 나가기도 했던 우리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마태복음 11장 4절) 이 시대 교회 안과 밖 모든 장년과 청년들은 이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야 한다. 그 분이 정말 믿을만한 분이신지, 번영이 아닌 정체 속에 있는 나의 삶 속에도 그 분이 하신 말은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지금도 대답하고 계시며, 교회는 그 대답을 들려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라는 한사람에 대해서 소개해야 하며, 그 한사람의 대답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꾸 그 대답을 회피하고 일시적인 처방전을 내놓는다면, 교회는 커져만 가는 우리네 삶의 위기를 결코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그 대답을 주는 교회는 정체 속에 방황하는 많은 영혼들을 품게 될 것이다.
돈이면 될 것 같았는데 아닌 걸 깨닫고 쾌락을 찾았다. 쾌락이면 될 것 같았는데 아닌 걸 깨닫고 인문학을 찾았다. 인문학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걸 깨닫고 이제 음식과 여행 이야기만 하는 것이 우리 모든 현대인들의 현실이다. 자, 이제 그 분께 질문 할 준비를 하자. “정말 내 인생은 먹방과 여행이 전부입니까?” 정체되어만 가는 내 삶에 대해 예수님께 솔직하게 물어보자. 그 답을 들려줄 수 있는 교회를 가 보자. 요한에게 대답하셨던 예수님께서 여전히 대답해 주실 것이다. 요한은 만족했다. 당신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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