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여 들어온다. 걸러 내는 것이 신앙이다.”
(12. 25. 2016.)
여호수아 5:12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새로운 일을 맡기신다. 그러나 내 신분에 분열증세가 느껴진다. 나는 (1)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임과 동시에, (2)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다.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는데 무슨 하나님 타령인가? 나는 세상의 물결 속에 한 없이 작아져만 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직접 공급 받았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을 호위했다. 먹을 것도 매일 주어졌다. 만나가 하늘에서 직접 내려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만나가 그쳤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여호수아 5:12) 이제는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아야 했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들은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다!” 농사 짓는 것은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가? 그 땅을 살았던 이방인, 가나안인들에게 굽신거리며 배워야 했다.
굽신거리며 배워야 할 때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악한 것이 서로 “섞여 들어온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팁을 더 준다. “농사를 잘 짓고 싶소? 그러면 풍요의 신 바알에게 제사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해요.” 농사의 기술과, 바알이 섞인다. 하나님과 바알이 섞인다. 선과 악이 섞인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삶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섞여 들어오는 것을 걸러내야 한다. 신입사원의 신분만 가지고 있으면 머지 않아 나의 삶은 “가나안화 된다.” 그 어떤 차별화도, 그 어떤 구별됨도, 그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하는 삶이 될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처음 가서 배우는가? 완전히 말단, 완전히 무시당하는 인생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영원히 모르는 인생 길의 심판도 막아주셨다. 그렇기에 그분은 일시적인 내 삶에 내가 잘 모르는 길에서도 나를 지키실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무지한 나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하게 했다. 그 분의 고난을 믿기에, 그분께서 무지한 나를 가나안의 모든 압박으로부터 지켜 주실 것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시도 하는가? 처음 배우는가? 처음으로 만나는가? 하나님과 바알이 섞여들어올 것이다.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붙들라. 걸러내라. 걸러 내는 것이 신앙이다.
[1-2] 내가 처음 배우고, 가장 막내일 때 가장 굴욕적인 순간들은 언제였습니까? 무엇이 서러웠습니까?
[3-4] 아무리 하나님이 보내신 곳일지라도, 선한 것만 배우게 됩니까? 내 삶의 현장에서는 어떤 것이 섞여 들어옵니까?
[5-6] 예수님의 고난이 무지한 나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져냈음을 믿습니까? 그러면 내 삶에 섞여오는 위협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왜 걸러 낼 자신감이 생기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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