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못하는 사람을 상대하기”
(2. 9. 2020.)
스바냐 3:17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해도, 함께 일하고, 살아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사람의 재능, 실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일인데 실수하고, 빠르게 해야 하는 일인데 느려 터진 사람을 만나보았는가? 복음이고 사랑이고 생각도 나지 않는다. 분노만 치밀어 오른다.
객관적으로 잘못한 사람에게 화내고, 무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사람에 대한 나의 반응은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어리고 미숙한 아이의 걸음마를 보라. 답답하고 내 삶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하지만, 모습 자체가 기쁨이 된다. 아이와 나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운전을 할 때 모르는 사람의 끼어들기는 참을 수 없지만, 그 차의 운전자가 내가 아는 사람이었을 땐 여유가 생긴다. 운전 실력보다, 관계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실력으로 대하지 않으신다. 관계로 대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 관계 속에 기뻐하시는 것이지, 실력의 수준으로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 사랑을 받은 자인가? 나의 분노와 무시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사랑하는 관계라면, 분명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순종의 실력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거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계를 거부한 나도 사랑하셨다. 그 증거가 예수님이다. 이기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한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 때 나는 변한다. 실력이 없고, 일을 못해서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이유없이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도, 친절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척하지 말라. 당연히 화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상대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방식을 다시 생각하라.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한 자였고, 그럼에도 구원받았음을 안다면, 아무리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상대를 대하는 나의 반응은 달라져야 한다.
[1-2] 일을 하거나 같이 살아갈 때, 상대의 재능, 성격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경험들을 나누어봅시다. 생각해보면, 같은 행동도 관계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달라집니다.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3] 스바냐 3장 1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이 구절에 실력과 외모가 나옵니까? 우리의 사랑, 우리의 친절과 다른 점을 찾아봅시다.
[4-5]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동만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거부하였습니까? 관계를 거부한 우리마저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실력을 넘어서 이유 없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도 달라져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변화되어야 할 나의 관계의 태도를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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