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에게 보내는 편지
(2. 8. 2015)

 

알랭 드 보통, 안녕하세요? 최근 한국에서는 당신의 책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뉴스의 시대와 같은 책 말입니다. 사실 그 책에서 당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은 이미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많이 다뤄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정통 무신론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정통 무신론자에게 환영 받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Neo 무신론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무신론의 약점을 보완한 개정판이 나왔다는 느낌이랄까요.

 

먼저 당신은 자유의지론자, 회의주의자들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그것은 타인의 자유의 침해다.”라고 말하는데, 당신은 그들에게 반박합니다. “오히려 중립보다 도덕적인 간섭이 있어야 할 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예로 당신은 자녀를 키우는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소원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성과 자제심을 갖도록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유혹에서 보호가 필요하듯이, 남자 성인이 성인물로 도배된 거리를 지나가거나, 여자 성인이 쇼핑센터 지나갈 때 느끼는 유혹은 사실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기존 무신론자들이 종교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것인지 지적합니다. 성인에게도 도덕적 가치는 아직도 중요함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더 나아가 다양한 분야에서 무신론적 자유의 허무함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이 시대 대학의 실패를 잘 표현해주셨습니다. “대학은 문화에 관한 사실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는 매우 전문적인 능력을 획득했지만, 학생들이 그런 사실적인 정보를 지혜의 레퍼토리로 사용하도록 훈련시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라고 표현하셨더군요. 대학은 사실만 줄 뿐 우리의 삶에 혼돈이 왔을 때 대처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지요.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해석에 기준 같은 것은 없다는 낭만주의적 사조를 당신은 혐오합니다. 그리고 미술관에서 척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앞에 멍하니 서서 카탈로그를 열심히 뒤적인다. … 그들은 미술에 의해서 자신이 변하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그들이 고대하는 천둥번개는 결코 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은 무신론의 허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사실을 아는 것 만으로는 살 수 없고,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접근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기독교 서적인 줄 착각했습니다. 당신은 무신론자이면서 왜 종교가 우리의 삶에 주고 있는 풍성함을 말하고, 무질서적 자유를 외치는 자들의 허망함을 이야기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서문에 잘 나오더군요. 당신은 모든 종교적인 접근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부활, 천국, 지옥과 같은 말이 안 되는 부분만을 제거하자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실용주의적입니다. 몇 가지를 취사 선택한 알랭 드 보통 만의 종교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으니까요.

 

기독교인으로서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자(Do)주의의 한계를 또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종교의 가르침이 싫어서 모더니즘, 이성을 강조하자로 왔습니다. 이성의 끝이 전쟁임을 깨닫고 인류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제 마음대로 하자로 왔습니다. 마음대로 했더니 세상이 엉망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에 말이 안 되는 부분만 빼놓고 종교적으로 살자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정말 사는 방법을 바꾸면 답이 나오는 것입니까? 혹시 인간에게 뭔가 할 능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새로운 방법을 써 보자고 말하는 건데, 솔직히 묻겠습니다. “당신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서, 책에 쓰신 대로 사람들이 살 것 같습니까?”

 

당신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활, 천국, 예수님의 피와 같은 부분은 기독교의 말도 안 되는 부분이 아니라 기독교의 중심 중의 중심입니다. 당신도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종교적으로 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반대입니다. “사람은 그런 것들을 할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해주시기 위해 왔다.”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절대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보라, 열심히 도덕적으로 살아보라고 다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 삶을 결코 살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분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는 그래서 "하자"가 아니라 "받아들이자"고 합니다. "하자"의 한계를 인정하면 "받아들이자"가 가능해집니다. 기독교는 받아들임을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을 받아들이고, 부활을 받아들이고, 나의 죄인됨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당신이 말하는 "말도 안 되는 부분"을 뺄 수 없는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도 소중히 생각하는 많은 가치관의 근원이 기독교임을 인정한다면, 왜 그 부분만 받아들이고, 그 모든 근원이 되는 설명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 이성적으로 이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세련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부활, , 창조와 같은 더 깊이있는 원리들을 무시하는 것은 또 다른 편협함입니다좋은 음식 냄새가 나면, 어디서 그 냄새가 나는지 찾아가 보십시오. 부분을 취사선택하지 말고, 전체를 만나보십시오. 그것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서마저도 실용주의를 택하는 실수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분명 실용적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가 실용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 삶의 본질을 결정짓는 문제에서마저도 유틸리테리언이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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