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함보다 간절함이 커야한다”
(1. 4. 2015)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입시 제도에 만족 하는가? 그 연봉에 만족 하는가? 그러한 사회시스템에 만족하는가? 비인격적인 사람들, 불합리한 제도는 우리의 삶을 답답하게 한다. 그 속에서 지친 사람들은 서로를 공격하기 바쁘다. 불만, 억울함, 분노로 가득 찬 곳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나사로라는 거지는 우리 사회를 잘 대변한다. 대접 받지 못하고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불공평, 무시, “갑질”의 희생자였다. 예수님은 이 상황의 답답함을 아실까?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자, 100% 사람이셨다. 그래서 나사로 앞에서 사람들이 느낀 답답함을 똑같이 느끼셨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요한복음 11:38) “이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분노를 가지셨다.
다음 장면에 “나사로가 구걸할 때 밥 안 준 자식들 다 나와!” 하셨다면 우리 속이 시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복수로, 심판으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악의 속성을 아주 잘 이해하셨다.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이런 구절을 남겼다. “악을 타도하거나 유예하고 나면 … 악은 또 다른 모습으로 곧 다시 자라나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그래봐야 악이 사라지지 않음을 아셨다. 왜 악은 사라지지 않는가? 악은 특정한 행동과 제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존재해서 그렇다. 심판의 칼을 휘둘러봐야 그 악은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예수님은 그 답답함을 아셨다. 그러나 악을 끝내고자 하는 간절함이 더 크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방법을 택하셨다.
악을 끝내는 방법은 예수님 혼자 다 뒤집어쓰시는 것밖에 없었다. 죄와 심판, 잘못과 지적, 갑의 공격과 을의 반격, 이 무한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을이 되신 후 반격하지 않으셨다. 죄와 복수의 악순환은 여기서 끝났다. 인류의 턴어라운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나를 향한 답답함보다, 나를 살리기 원하시는 간절함이 더 크셨다. 예수님은 나에게 갑질 하실 수 있었지만 나에게 복수하지 않으셨다. 여기에 죄의 종말이 있다.
삶의 부조리와 답답함 속에 방치된 듯 느껴질 때가 있다. 분노로, 복수로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 먼저 나에 대한 답답함보다 나의 성장에 대한 더 큰 간절함을 주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상대에 대한 답답함을 풀려 하지 말고, 변화에 대한 간절함을 더 크게 만들라. 당신이 부모인가? 자녀의 행동이 답답하지만 아들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열매를 낳는다. 당신이 교사인가? 학생이 답답하지만 문제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실력 향상을 낳는다. 당신이 부하 직원인가? 상사가 답답하지만 함께 이 일을 끝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성과를 낳는다. 답답함보다 간절함을 크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이다. 언제나, 답답함보다 간절함이 커야 한다. 그것이 악을 이기는 길이다. 그것이 변화를 일으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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