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운 제단”
(5. 24. 2020.)
역대하 6:40
중고등학교 때 교회 수련회를 가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교회 수련회를 갔던 사람들은 은혜 받은 기억이 꼭 있다. 40일 작정기도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러나 작정기도를 경험한 사람들은 많은 기도 응답을 고백한다. 왜 그런가? ‘내가 세운 제단’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세운 이곳에서 기도할 때, 특별히 함께해 달라는 간구를 한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역대하 6:40)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 아닌가? 그러나 ‘이 곳’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응답하실 수 있는 분 안인가? 그러나 ‘이 곳에서’ 응답하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개인적인 행동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내가 세운 제단에서 일하신다.
신약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성전이 따로 없다. 예수님이 성전이시다. 그러나 내가 세운 제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마다 경건생활의 모습이 다르다. 20일 기도, 40일 기도, 금식기도, QT 생활, 제자훈련, 새벽기도 등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명심하라. 내가 세운 제단이 있어야 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내가 다니는 교회를 통해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직접 다짐한 경건생활을 통해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영적인 생활을 확보하라. 그것이 내가 세운 제단이다.
예수님은 어디에서나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단은 분명 따로 있었다. “예수는 물러가서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누가복음 5:16) 붐비는 곳에서도 기도하실 수 있는 분 아니었는가? 어디에서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분 아니었는가? 그러나 특별히 구별된 겸손의 시간, 특별히 구별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을 잊지 않으셨다. 그 겸손이 십자가의 무게를 지탱해 낸 것이다.
나의 신앙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교만해지다가, 내가 세운 제단까지 잃어버리지 말라. 그러다가 내가 져야 할 십자가까지 잃어버릴지 모른다. 내가 직접 결심한 제단을 다시 세우라. 하나님은 그곳에서 일하신다.
[1] 신앙생활 중에 특별한 행사, 특별히 구별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어떤 기간, 어떤 방법이었습니까?
[2-3] 역대하 6장 40절을 읽어봅시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특별한 장소를 강조합니다. 그곳은 어디였습니까? 예수님이 성전이 되어주시는 시대에 살고 있는 중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내가 세운 제단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4-5] 누가복음 5장 16절을 읽어봅시다. 무엇이든 가능하셨던 예수님이 왜 따로 기도하셨을까요? 그 겸손함은 장래에 무엇을 지탱하는 능력이 되었습니까? 형식이라는 이름으로 불편해하던 나의 경건생활을 돌아보고, 내가 세운 제단에서 하나님을 다시 기대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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