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겅퀴 속의 소망"
(4. 24. 2016)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태를 창세기는 이렇게 표현한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세기 3:18) 일을 할 때 방해, 실패, 꼬임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끊어진 사람은 엉겅퀴 속에서 산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을 구원하셨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 우리는 그 땅을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내 것이다. 그래서 소망이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 속에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은 것을 미뤄야 할 때가 있다." 아직 삶의 엉겅퀴가 남아있다는 말이다. 내 삶의 완벽, 온전함, 거룩에 대한 꿈이 있지만, 동시에 방해와 좌절이 여전히 있다.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멋진 꿈이 있는 청년이 있었다. 꿈이 너무 크다 보니 주변을 돌아보면 답답함만 생겼다. 내 부모는 도대체 답답하기만 하다. 주변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 투성이다. 무엇 좀 해보고 싶은데 돈이 없다. 다들 나보다 실력도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을 이루려고 했는데 주변에 가시덤불이 너무 많다. 주변의 방해 때문에 내 꿈이 망가졌다. 과연 그런가?
하나님은 이 땅에서 완벽한 것을 만들어 내라고 하지 않으셨다. 완벽함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이루어진다. 우리는 엉겅퀴를 "관리하며 가야 한다." 내 주변에 불완전한 가족, 실력이 부족한 사람, 돈이 부족한 내 상황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모든 좋은 것을 동시에 취할 수 없다. 그것이 이 땅의 삶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주의자가 되면, 냉혈한이 된다. 모든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실수는 이 땅에서 없애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천국을 이루려다가 결국 자기도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여 자신마저 심판대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이것이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신앙생활이다. 이 현실을 즐겁게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도 더욱 커지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나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가시덤불의 지금 내 삶도 소망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주변의 부족한 사람을 인정하라. 몇 가지 좋은 것을 누리고, 몇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감사하라. 곧 그 모든 것이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다. 그래서 우리는 엉겅퀴 속에도 소망이 있다.
[1] 창세기 3장 17~19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과 끊어진 세계는 어떻게 묘사됩니까?
요한계시록 21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회복되는 세계는 어떻게 묘사됩니까?
[3-5] 하나님은 이 땅에서 유토피아를 이루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최근에 내 계획이 부정적인 영향이나 실수 때문에 틀어져서 분노하거나, 좌절한 적이 있습니까? 혹시 주변에 '실력이 없는 사람'에 대한 당신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6] 미래에 완벽히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어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약속 때문에 현실을 견뎌냈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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