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교회 칼럼

"큰 일 하지 말라"(6. 19. 2016)

서창희 2016. 6. 18. 10:37

"큰 일 하지 말라"

(6. 19. 2016)

 

세상에 괜찮아 보이는 일이 많다. 보람 있겠다 싶은 일도 많다. 경영학과에서 여러 강의를 들었다. 수업마다 강사진이 와서 다양한 직무 소개를 했다. 모든 곳이 다 매력 있었다. 모든 곳이 다 그럴 듯 했다. 그래서 난 정신병에 걸렸다. 도저히 어떤 길을 가야 할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다 좋아 보인다. 그럴 땐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는가? "열어주시는 곳이 인도하시는 곳이다." 가장 큰 곳, 가장 유명한 곳이 아니다. 심지어 가장 어려운 일, 가장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곳도 아니다. 아무런 내적 확신도 없는데 하나님을 말하면서 큰 일을 향해 무리하게 전진하지 말라. 나에게만 열어주시는 만남과 길이 있다. 내게 열어주시는 길로 가라.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다윗이 왕이 된 후 많은 큰 일, 대단한 사업계획서, 엄청난 보고서들을 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렸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편 131:1) 그가 고백했던 것은 한가지였다. "난 하나님의 임재만을 바랍니다."(3) 다윗은 큰 일에 집착하면서 교만해지고 오만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에 마음 두지 말아야 한다. 큰 일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하는 나의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내 생각대로 순종하는 것도 문제다. "우리 사랑할까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결혼 안에서만 성관계를 허락하셨다. 한 형제는 교제하는 자매와 결혼 전까지 관계를 맺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너무 중요하게 느껴진 나머지, 자매와 함께 부둥켜 안고 뜨겁게 기도했다. 결국 부둥켜 안고 기도하다가 스킨십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김빠지는 일인가? 가볍게 만나는 것이 내게 주신 길이다. 괜히 부둥켜 안고 참는 일은 큰 일이다. 괜히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큰 일을 하겠다고, 대단한 것을 참겠다고 하지 말라. 무조건 넘어진다. 열지 않으신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길 국가적 위기에 놓였다. 예레미야는 바룩이라는 비서를 을 통해 글로 이스라엘의 위기를 예언했다. 바룩은 이 나라에서 자신의 인생도 함께 망한 듯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내 방식대로 순종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바룩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45:5) 나의 주변 상황이 위기가 벌어져도, 너에게는 개인적인 구원이 임한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개별성이다. 전체의 위기가 와도 구원은 개별적이다.

 

지금 내 관심사를 점검하라. 주변에 대단한 일에만 관심 갖지는 않는가? 혹은 주변을 탓하면서 자기 방식대로 순종하다가 넘어지진 않았는가대단한 일이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 환경이 나를 구하지 않는다. 아무리 위기가 와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면 나는 길이 열린다. 구원은 언제나 개별적이다. 구원은 내게 열린 길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임재를 구하라. 그의 임재 안에 거하라. 그것이 가장 큰 일이다.

 

[1-3] 진로나 의사결정과 같이 선택의 순간에 모든 것이 그럴듯해 보여 고민한 경험들이 있습니까? 무엇이 판단 기준이었습니까? 어떤 식으로 인도함 받았습니까? 혹시 열리지 않는 문에 많은 시간을 쏟은 적이 있습니까?

 

[4-5]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도 무리한 행동을 계속 할 때가 있습니다. 내 방식대로 행동하다가 어려움을 겪는 삶의 영역(사람, 환경, 습관)은 무엇입니까?

 

[5-6] 예레미야 45 3-5절을 읽어봅시다. 바룩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었으나, 구원은 개별적임을 말씀하십니다. 환경을 이야기 하며 나의 절망과 죄악을 정당화 하고 있진 않습니까? 개별적인 구원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