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교회 칼럼2

수컷칼럼23 “도시 남자의 우상”(1. 7. 2015)

서창희 2015. 1. 5. 21:57

수컷칼럼23  도시 남자의 우상
(1. 7. 2015)

 

왜 남자는 조직 속으로 들어가는가? 더 큰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렇다. 조직은 개인보다 더 큰 일을 한다. 남자는 그래서 조직의 상징인 기업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기업들이 모여서 상호작용하는 곳이 어디인가? 도시이다. 그래서 남자는 도시로 간다. 한국경제 논설위원 정규재씨는 그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 서초동의 밤을 밝히는 고층 빌딩이 아니라면 삼성전자는 그토록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수많은 전자제품의 생산과 공급을 세계적으로 결합해 낼 수 없다. 지식과 창의를 교환하면서 개인의 한계를 초월해가는 도시인의 생산 방식을 생각해보라. 고층 빌딩을 올려다 보면서 청년들이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무엇가를 느끼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더 큰 일,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하려면 사람이 중심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사람 속에만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하나님의 창조의 속성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면 좋은 도시,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러나 작품이 너무 대단하다. 도시가 너무 크다. 그러다보니 남자는 조직, 업적, 도시 자체를 우상화시킨다. 개인이 모여 만든 거대한 것을 아이돌로 만들어 버린다. 만들고 나니 불상의 눈빛이 나를 뚫어보는 것 같다. 만들고 보니 나보다 스마트폰이 똑똑한 것 같다. 만들고 나니 타워의 높이에 비해 내가 너무 왜소해 보인다. 그곳에 절한다. 인간을 무시한다. 건물만 만든다. 제품 개발에만 몰두한다. 개발하는 남자들은 정작 지쳐 죽어간다. 그것이 현대판 남자의 아이돌이다.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하박국 2:19)

 

세상도 창조적 속성은 사람에게 있음을 간파한 듯하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그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진정한 도시의 힘은 사람으로부터 나옴을 말한다. “휘황찬란한 새 건물은 쇠퇴하는 도시의 미관을 멋있어 보이게 만들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시의 근본 문제를 치유하지는 못한다. 쇠퇴하는 도시의 대표적 특징은 경제 규모에 비해서 주택과 인프라가 과도하게 많다는 점이다. 주택과 인프라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더 많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건물 중심으로 도시를 개편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도시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무슨 말인가? 제품 개발, 인프라, 작품이 사람보다 더 중요해지면, 그때부터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작품을 우상화시키지 말라. 기업을 우상화시키지 말라. 아무리 높고, 아무리 위대해도 그것은 모두 사람의 피조물이다. 기업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사람을 세우는 방향이어야 한다. 도시의 최종 목표는 위대한 인프라가 아니라 위대한 사람을 길러내는 쪽으로 흘러야 한다. 작품은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창조성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쪽으로 굴복해야 한다. 창조의 질서 안에 머무르라. 남자의 회복, 도시의 번영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