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말을 듣는 마음"(9. 17. 2017.)
"두 말을 듣는 마음"
(9. 17. 2017.)
잠언 18:17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결론이 이상하다. '나쁜 놈을 때려잡자'고만 소리치고 있다. 이제 사람에게 얼룩이 보이기만 하면 몽둥이질을 한다. 그러면 정의가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악은 더 복잡하다.
성경은 모든 인간의 타락을 선언한다. 나쁜 놈을 보이는 대로 잡는다고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다. 모두가 나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쁜 사람들 속에서 나름의 경중을 따지는 신중함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이 본 사람이 악한가? 상대방은 더 악할 수 있다. 누군가 잘못했는가? 그 잘못을 증폭시켜 또 다른 악을 이루려는 세력도 있다. 그러니 악을 보거든, 다른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라. 단순히 분노하는 당신도 정의롭지 못한 패거리다. 한쪽 말만 듣고 일방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의를 원하는가? 그러면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들으라. 성경은 한쪽 말만 듣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언 18:17) 사건이 일어났는가? 아직 반응하지 말라. 반대의 이야기도 듣고 말하라. 나쁜 일이 벌어졌는가? 분노하지 말라. 먼저 상대자의 이야기도 듣고 판단하라. 잘못한 놈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를 절대적인 악으로 몰아가는 것은 성경적인 시각이 아니다. 다 들어봐야 한다. 좀 더 기다려 봐야 한다.
240번 버스기사가 글 하나로 매도 당했다. 실제로 알고 보니 버스기사가 잘못한 것은 별로 없었다. 사회 분위기가 이런 식이다. 정의를 빌미로 섣불리 판단하여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엄마와 아이가 부득이 떨어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으니, 버스기사는 무조건 죽으면 되는 것인가? 양치기 소년이 말 한마디 하면 때려잡기 바쁘다. 나의 분노가 오히려 정의를 왜곡시킨 것이다. 흥분하지 말고 두 말을 들으라. 분노의 절제가 정의를 낳는다.
당장 완벽히 심판하지 못했어도 괜찮은가? 그렇다. 최종심판자가 계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심판자로 이 땅에 다시 오신다. 그분 앞에서는 나도 심판 받는다. 내가 잘못 판단했던 복수까지도, 제대로 판결되지 못해 답답한 사건도 심판하실 것이다. 왜곡된 모든 것들을 바로잡으실 그분을 믿고 절제하자. 어딜 봐도 악밖에 없는 나를 때려잡지 않으신 그분 앞에, 나도 조금 여유를 갖자. 하늘의 정의를 신뢰해야, 이 땅의 정의에 너무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있다. 두 말을 듣는 마음을 품으라. 삶이 여유로워 질 것이다.
[1-2] 사람의 실수와 악을 보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실수과 악을 노리는 더 큰 악의 세력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생각보다 나쁜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3-4] 잠언 18장 17절을 읽어봅시다. 성경은 송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줍니까? 최근 240번 버스기사 사건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뉴스와 주변 소식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봅시다.
[5] 이 땅에 완벽한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장 분노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말을 듣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정의에 후퇴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히려 정의로울 수 있습니까? 내가 두 말을 모두 듣고, 마음의 편향된 생각을 버려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