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더 불쌍해 보여야 한다"(9. 3. 2017.)
"그가 더 불쌍해 보여야 한다"
(9. 3. 2017.)
마태복음 14:14
남에게 동정할 여유가 없다. 그것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다.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밀린다. 몸은 아파오고, 나이는 들어간다. 능력은 없는데, 요구하는 성과는 많아진다. 내 인생, 참으로 불쌍하다.
내가 불쌍한가, 상대가 불쌍한가? 삶을 바라보는 핵심 질문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기연민"이라고 한다. 언제 자기연민이 생기는가?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 내 편을 들어줄 사람,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없을 때 생긴다. 즉, "불쌍히 여겨줄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자기연민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왜 불쌍한가? 저 사람이 더 복 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 유익을 얻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다. 인정받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저 사람은 참 챙겨주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나보다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아니다. 예수가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위로이자 소망이다. 자기연민을 벗어나는 길이 여기에 있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람의 관계 속에서, 모든 시기에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주실 분이 주님이시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시니라"(마태복음 14:14) 내 삶을 다르게 보아야 한다. 저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복을 받았다. 유익을 얻는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라 나다. 예수가 나를 인정하신다. 예수가 나를 챙기신다. 이 상황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이 있다. 내가 불쌍해 보이는가 그가 불쌍해 보이는가?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의 죄마저도 다 책임지셨다는 확신은, 자기연민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상대를 향한 연민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상대가 불쌍해 보이게 만든다. 내 삶을 향한 예수의 긍휼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의 긍휼을 상대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경건이다.
내가 불쌍한가, 상대가 불쌍한가? 언제나 그가 더 불쌍해 보여야 한다. 그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라. 인내하라. 다시 묵상하라. 불쌍해 보일 때 일하라. 불쌍해 보일 때 말하라. 그 때 죄가 아니라 주님의 방법, 주님의 지혜로 일할 수 있다. 무조건이다. 그가 더 불쌍해 보여야 한다.
[1-3] 내 스스로가 가장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그런 마음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까?
[4-5] 성경은 자기연민에 대해서 어떤 처방을 내립니까? 예수님은 내 인생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그 증거로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내 삶에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6] 그리스도인으로서 상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내 삶에 예수의 긍휼을 체험하고, 그 임재 안에서 일하려면 어떤 영적인 훈련들이 필요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