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교회 칼럼

“용서의 선두가 되라”(6. 22. 2014)

서창희 2014. 6. 21. 18:38

용서의 선두가 되라
(6. 22. 2014)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13살 된 딸을 키우는 부모가 있었다. 딸이 실종되었다. 7주 동안 헤맨 끝에 딸을 발견했다. 딸은 손발이 묶여 얼어 죽어 있었다. 범인을 찾지 못했다. 20년이 지나고, 범인을 찾았다. 이 범인은 여자 아이의 손발을 묶고 아이가 고통스러워할 때 기쁨을 느끼는 왜곡된 성적 욕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딸을 잃은 이 엄마는 교회에 갔다. 팀모임 시간에 광적인 성욕을 심하게 욕했다. 다음날, 함께 팀모임 했던 친구가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는 자신이 포르노, 몸을 묶는 행위,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중독되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친구는 그러한 왜곡된 성욕을 벗어나지 못해 신음하는 사람이었다. 이 고백을 한 후 그녀는 매우 걱정했다. 친구가 팀모임 때 왜곡된 성적인 행동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받아주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전화를 받은 이 엄마는 고민했다. 분노를 택해야 할까? 친구를 택해야 할까? 그녀는 친구를 품고 싶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친구를 용서하려면, 나의 딸을 죽인 그 사람도 용서해야 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를 잃지 않으려면, 딸을 잃은 나의 삶도 멈추지 않고 전진할 수 있으려면, 용서의 문을 꼭 통과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분노의 문에서 돌아섰고, 용서의 문을 열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은 여느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새벽기도 중에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다고 한다. “일본에 사과하라고 하지 말고, 네가 먼저 일본을 용서해야 한다.” 누구 마음대로 용서냐, 당해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목사님은 흔들리지 않으셨다. 분노의 끝은 죽음과 허무함 뿐임을 아신 것이다. 그 후 목사님은 일본에서 열린 러브 소나타 집회에서 일본에 대한 용서를 선포했다. 그러자 일본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겠다고 결단했다. 용서가 새로운 생명을 낳은 것이다.

 

딸을 잃은 부모가 피해자를 용서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다. 딸을 잃고 정신을 잃어갈 즈음, 집에 한 부부가 찾아왔다. 문을 열자 낯선 부부가 이렇게 말했다. “저희도 살인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입니다.” 용서의 길, 회복의 길을 먼저 걸었던 한 부부였다. 자신들의 분노에 갇혀 살지 않고 먼저 그들을 찾아왔다. 결코 분노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부부는 용서의 길로 초대받았고, 그 길을 함께 걸었다.

 

다 분노하고, 다 피해자라고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세상은 어떻게 용서하는 것인지를 모른다. 용서의 길을 가 본 사람을 찾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용서해 주셨다. 용서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따라가라. 원망하지 말고 예수님 따라 그 길을 걸어가라. 용서의 선두가 되라. 먼저 용서하고, 먼저 연락하고, 먼저 웃어주라.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걸어간 그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로새서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