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6. 26. 2022.)
“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
(6. 26. 2022.)
사도행전 4:13-14
사람은 본능적으로 주변에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안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안다. 저 사람이 나 예쁘다고 생각 안 하는구나. 상사가 나 성과 못 낸다고 싫어하는구나. 나를 늙었다고 여기는구나. 상대의 생각이 다 읽혀지니까, 상대의 원함을 맞춰줄 수 없는 나의 무력감은 심해진다.
신자는 세상에서 요구하는 자격이 없어도 승리할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식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uneducated) 범인으로 알았다가”(사도행전 4:13) 못 배운 사람이라 사회에서 인정 못 받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특별한 성과가 나게 하셨다.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4) 무식한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못했다. 예수님 때문에 생긴 특별한 일이 그들의 낮은 스펙을 보호해준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로 나를 살려 주신다는 말이다. 스펙은 없었지만 앉은뱅이 일으킨 것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완전히 인정받았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의 능력이 부족한 곳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일 해보라. 스펙으로는 완전히 무시당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특별한 일들이 생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한다. 나를 필요로 한다. 나랑 일하자고 한다. 돌아보면 별 거 없다. 예수님이 비난할 말이 없게 나를 보호해주신 것이다.
세상적인 능력이 부족한 곳에서 예수님이 보호해주실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분이 바로 나 대신 비난과 조롱을 받으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태복음 20:19) 나는 죽은 이후 하나님 앞에서 마귀의 조롱을 당할 존재였다. 죄를 지은 더러운 존재라고 조롱 당할 나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조롱 당하시며 나를 보호하신 것이다.
나는 이제 조롱의 한 복판에 선 오늘의 내 인생 속에서도 확신할 수 있다. 죽음 앞에 선 나를 보호하신 주님이, 능력 없고 무력한 내 삶의 한복판에서도 함께하실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특별하게 나를 보호하시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그 이름을 의지하라. 그것이 보호받는 길이다.
[1] 크리스천이 되어도, 세상적인 무능과 주변의 평가는 여전히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삶의 현실적인 무능 속에서 신앙의 무가치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사도행전 4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 6절을 읽어봅시다. 그들의 삶이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여전히 스펙은 없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14절)
[4-5] 예수님께서 세상의 요구에 맞춰주지 못하는 나를 보호하실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내 삶의 연약한 부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행해야 할 일을 나누어봅시다. 그 분을 의지했을 때 나를 보호하시는 특별한 일이 생겼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