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교회 칼럼

“섭리의 하나님”(11. 9. 2014)

서창희 2014. 11. 8. 12:48

섭리의 하나님
(11. 9. 2014)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내가 내 인생을 개척하는 일이다. 어느 학과가 뜰까? 나의 전공에 나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의 부담이 너무 크다. 취업을 준비하는데 어느 회사가 좋을까? 그 회사가 과연 20년 이후에도 성장할 기업일까? 그 판단을 하기엔 내 지식이 너무 좁다. 나의 자녀는 어떻게 자랄까? 망나니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인생에 출산만큼 큰 도박도 없다. 내 인생을 내가 디자인한다고 생각하면, 결국 나의 자유는 지옥이다. 생각해보라. 내 판단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면, 남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얼마나 억울한가!

 

하나님을 믿으면 억울함에서 벗어난다. ‘섭리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섭리란 무엇인가? “두 번째 원인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세상의 첫 번째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하나님은 자연, 사람 같은 두 번째 원인이 만들어내는 결과도 통제하신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 뜻이 이루어진다.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 뜻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두 번째 원인을 통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신다. 그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카투사에 가고 싶었다. 몇 개월간 새벽기도에 나가서 매일 기도했다. 나처럼 신실하게 카투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전국에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그만큼 확신이 왔다. 발표일이 되었다. 문자가 왔다. “축하합니다. 가투사에 합격하셨습니다!” 난 주님을 찬양했다. 기도 응답에 너무 기뻤다. 그런데 이상하다. 옆에 합격한 내 친구와 문자의 내용이 달랐다. 친구의 문자는 입대에 관한 자세한 안내가 있었다. 나에겐 축하한다는 말뿐이었다. 나에게 온 문자는 친구가 장난으로 보낸 허위 문자였던 것이다. ‘카투사가투사로 잘못 쓴 건 친구의 오타였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기도는 과연 응답되는가? 이 세상은 과연 정의로운가? 카투사 하나 때문에 모든 신학적인 고뇌가 시작되었다. 과연 이럴 수 있는 것인가!

 

볼품 없는 포천의 어느 부대에 입대했다. 아무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이등병이 오자마자 교회 간다고 구박 당했다. 버티고, 울고, 기도하며 지냈다. 교회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믿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전역해서도 같이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사람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우울했던 어느 날, 서울에 살고, 교회에 다니는 후임이 연속해서 들어왔다. 난 그들과 같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 10, 20, 30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카투사에 가는 대신 한 부대를 전도했다. 카투사에 가는 대신 밖에서도 함께할 수 있는 평생의 동역자들을 만났다. 난 지금도 그들과 같은 교회에 다닌다. 매주 만난다. 왜 카투사에 떨어졌을까? 내 인생에 흑형들을 만나는 것보단 그 부대를 전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영어를 배우는 것 보다는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카투사를 이겼다.

 

돈이 없어서, 재능이 없어서 인생의 선택지가 적다고 불평 말라. 섭리는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다. 카투사가 없어도 된다. 섭리만 붙들면 된다. 학벌이 없어도 된다. 섭리만 붙들면 된다. 세상은 두 번째 원인을 통제할 수 없다. 두 번째 원인을 통제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편 103:19) 안타까움과 섭섭함을 뒤로하고 계속 가라. 섭리의 하나님만 신뢰하고 전진하라. 섭리가 모든 것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