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은혜를 구하라”(2. 22. 2015)
“발견의 은혜를 구하라”
(2. 22. 2015)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다르다. “군대를 빨리 다녀와야 한다.”는 말은 20살 새내기도 다 아는 말이다. 그러나 28살 남자에게 물어보라. 그는 그 말을 “깨닫는다.” 이미 알고 있었던 말인데 그 뜻이 무엇이었는지 모든 오감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것, 그것이 발견이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삶을 살아도 발견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발견은 지극히 수동적이다. 한 분야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라. 연구원들은 한 없이 실험하며 결과를 기다린다. 작가들은 한 없이 기다리며 한 줄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그들은 모두 수동적이다. 정해진 시간이 없다. 발견할 때까지 기다린다. 발견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작 뉴턴은 이렇게 말했다. "존재와 지식은 무한한 바다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전진할수록 우리 앞의 광막한 세계가 더욱 넓어질 뿐이다. 지식의 세계에서 한 번의 개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무지의 고백이 백 번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겸손함 때문에, 그는 떨어지는 사과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찾아낼 능력이 없다. 우연히 발견할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죽을 것이고, 삼일 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라고 수 없이 말씀하고 다니셨다.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마가복음 9:31) 그러나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32)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본 후에도 그게 무슨 말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그것이 부활이었음을. 예수님은 내가 발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와서 자신을 ‘보여주셔야’ 한다.
나는 삶의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나는 예수님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 발견의 은혜를 구하라. 외부에서 와야 한다. 발견되어져야 한다. 삶을 앎으로 풀려는 시도를 모두 그치라. 더듬거리기 전에,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예수님께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13:13)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책,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그 책, 그 장소, 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