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상처, 예수의 흔적”(6. 30. 2019.)
“내 삶의 상처, 예수의 흔적”
(6. 30. 2019.)
갈라디아서 6:17
삶의 모든 일이 통제 가능하다는 환상이 있다. 그래서 한 분야의 연륜과 지식이 쌓일수록 목소리도 커진다. 이건 이렇게 처리하고, 저건 저렇게 처리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못한 한심한 모습을 보면 비난과 냉소도 커진다.
그러나 거만함이 일시에 사라지는 경험을 하는 순간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경험하는 것이다. 가족이 심각한 병에 걸려 치료를 돕는 사람을 만나보았는가? 그 동안 의지했던 지식과 학력, 돈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범죄, 실연, 불합격, 빚더미에 앉은 사람을 만나보았는가? 자신의 자랑이 사라짐을 느낀다. 주변을 돌아보라.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많아지는 사람이 생기고 있다면 지금 통제할 수 없는 문제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라는 서신을 쓰면서 마지막에 나를 의심하고 힘들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르침과,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안에서 떳떳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라디아서 6:17) 자기가 참 사도였다는 흔적이 몸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흔적이 무엇인가? 인기와 부요함, 강해짐이 아니라 굴욕적인 매맞음을 당한 상처들이 온 몸에 있었다. 그에게 예수의 흔적은, 고난과 약함이었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날 강하게 한다고 했다. 틀렸다. 그리스도인의 죽을 것 같은 상처는 오히려 날 약하게 만든다. 그래야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삶에 통제할 수 없는 상처를 꼭 하나씩 주실 것이다. 당신이 복음 밖에 있다면 그 상처 때문에 더욱 완고하고 교만해질 것이다. 강해지려 할 것이다. 그 방향으로 가지 말라. 통제할 수 없다. 은혜만이 필요하다. 나는 그 어떤 세상의 것으로 내 인생을 자랑하고 자존심을 세울 존재가 못 된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실수록, 심문을 당하실수록, 강해지시지 않았다. 우리를 향한 사랑은 약해짐으로, 십자가의 못 자국을 지니심으로 이루신 것이었다. 상처 때문에 영생이 왔고, 못 자국 때문에 구원이 이루어졌다. 우리도 알 수 있다. 이제 나는 상처를 없애는 데에 인생을 쏟지 않는다. 상처 속에서 강한 척 하지 않는다. 물질, 관계, 성격의 모든 약함 속에 새로운 묵상을 시작한다. 통제할 수 없는 내 상처는, 나를 예수님 앞에 엎드리게 하는 ‘예수의 흔적’이다.
강해지려고, 상처 입힌 자를 욕하고 복수하려고 하지 말라. 내 상처는 예수님 안에서 풀어야 한다.그 상처가 나를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 만든다면, 그 길을 택하라. 내 삶의 상처는, 오직 예수님의 흔적이 될 때에만 치유된다.
[1-2] 당당한 사람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문제 하나 때문에 삶을 해석하는 모든 태도가 바뀔 때가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거만하였고, 어떤 문제들이 나의 거만함을 일시에 꺾어놓았습니까?
[3-4] 갈라디아서 6장 17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상처를 해석하는 성경의 시각이 세상의 시각과 어떻게 다릅니까?
[5-6] 우리를 위한 구원의 과정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상처를 지니셨습니까?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당면하면서 내가 예수님 안에서 다시 상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내 삶의 상처를 예수의 흔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생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