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교회 칼럼

“고난은 이해력이다”(4. 14. 2019.)

서창희 2019. 4. 10. 22:45

“고난은 이해력이다
(4. 14. 2019.)

고린도후서 1:3-4

 

이 땅에 고난이 필요한가? 필요 없을 것 같다. 단어를 바꾸어 다시 물어보자. 이 땅에 이해가 필요한가? 물론 그렇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은 내 마음을 이해 자체를 못한다. 답답함은 모두 이해 때문이다. 이 땅엔 이해가 필요하다. 고난은 곧 이해이다.

 

음식점에서 서비스에 실수가 있으면, 음식이 늦게 나오면 불같이 화를 내던 청년이 있었다. 그가 서비스직에 입사했다. 한 점포를 맡게 되었다. 방문하는 손님들로부터 온갖 불만을 들으며 응대했다. 지독한 고난이었다. 휴일에 그가 식당을 찾으며 말한다. "난 이제 클레임 안 걸어.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야." 그의 삶에 이해가 생겼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고난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이라고만 말하면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해라고 바꾸어보자. 당신은 이해심이 많은 사람인가? 다시 묻겠다.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보이는가? 무엇을 원하는지 보이는가? 그 갈등을 해결하는 핵심 키가 보이는가?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해심이 많은 것이다. 그 이해심은 어디서 왔는가? 당신의 어떤 경험 때문이었는가? 하나님의 내게 주시는 고난에는 언제나 ‘이해’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내게 사람과 삶을 이해하기 원하신다.

 

내가 왜 이해해야 하는가? 내가 먼저 이해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고난 당하신 것은, 죄인인 내가 당할 심판과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과 끊어지는 두려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고난 당하신 분이 이해할 수 있다. 죄 지었어도 용서받고 싶은 마음, 무너져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고난 중에도 새 길이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해하신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린도후서 1:4) 하나님은 이해하시기 때문에, 나의 위로가 되신다.

 

나의 가장 큰 고난, 죽음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신 분이 나의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아무리 큰 고난이 있어도 그분은 이 상황을 이해하실 것이다.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아실 것이다. 유익을 잃지 않게 하실 것이다. 이해하시는 분이 있기에, 나는 이 고난 중에서도 평안할 수 있다.

 

고난주일이다. 이해하러 그분이 오셨다. 이 땅에서 모든 삶을 통해 그분의 고난을 먼저 이해하자. 그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이해하자.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자. 나에게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1-3] 고난은 필요없다고 느껴지지만, 사실 고난 만큼 ‘이해심’을 높이는 것은 없습니다. 살아가며 이해되기 시작한 것들,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들, 이해해줘서 고마웠던 기억들을 나누어봅시다. 이해 뒤에는 언제나 어떤 경험이 있었습니까?

 

[4-5]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이해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왜 나의 상황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6] 내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 삶의 영역이 있습니까? 사람의 성격,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등, 이해를 위해 겸손해지고,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통해 이해가 넓어져야 할 삶의 영역들을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