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간접성
(4. 21. 2024.)

잠언 16:7

 

엄마가 보는 앞에서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엄마가 엄청 비싼 음식을 사줬다. 공부했을 뿐인데, 왜 음식이 오는가? 이 자녀는 ‘엄마 유니버스(universe)’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에 대한 보상이 엄마를 통해 온다.

 

신자의 삶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언 16:7)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행위를 했을 뿐인데, 나랑 원수였던 사람의 마음이 풀리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내가 ‘개별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종합적’으로 살피신다. 신자의 삶에 나만 아는 사적인 일이란 없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적인 일들은 하나님 한 분 앞에서 하는 일이 된다. 이것을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언제나 구원의 간접성을 기대할 수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은 어떻게 풀릴까?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서 풀린다. 오늘 이 단순한 삶을 회복하라.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생각하며 행하라. 분노를 죽였을 뿐인데 내 필요가 채워질 것이다. 죄를 끊었을 뿐인데 진로가 열릴 것이다. 기도를 시작했을 뿐인데 자녀가 변할 것이다. 소외된 사람을 격려했을 뿐인데 승진이 빨라질 것이다. 세상이 자신의 이익을 향해 ‘개별적’이 되어 갈 때, 신자들은 점점 더 하나님 앞에서 ‘종합적’으로 산다.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큰 문제를 어떻게 감당하셨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찾은 것이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우리에 구원이 주어졌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만 구할 때, 그분이 계획하신 놀라운 일들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펼쳐질 것이다.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하려고 발버둥치는 직접적인 구원의 추구를 그치라. 구원의 간접성 속에 살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원수와 화목해진다. 신자들에게만 주신 비밀의 약속이다.

 

[1] 부모, 친구, 상사 등 한 존재가 좋아하는 일을 했더니, 그로부터 다른 좋은 일이 흘러나왔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잠언 16장 7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내 삶의 모든 행위를 나의 이익과 편의에 따라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마가복음 14장 36절을 읽어봅시다.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주님이 주실 종합적인 구원을 믿으며, 오늘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삶의 모습들을 나누어 봅시다.

“경험을 통한 사랑
(4. 14. 2024.)

신명기 32:11-12

 

엄마 돈 함부로 쓰던 청소년이 처음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인생이 이렇게 힘든 건가 느끼며 서럽게 집에 돌아왔다. 식탁 위에 어제와 똑같이 엄마가 두고 간 용돈 5천 원을 본다. 그는 오열했다. 경험을 통해 이미 존재하던 엄마의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시키신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명기 32:11-12) 하나님 사랑은 모른다. 그런데 독수리의 자식 사랑을 본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는 방식도 이해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게 하신다.

 

내가 하고 있는 지금 그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라. 한 자매가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다. 사랑에 빠지니 그 남자가 늘 생각나고, 생전 하지 않던 일들을 기쁨으로 했다. 그 남자는 떠났지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연애 경험을 통해 내 안의 하나님 사랑을 발견한 것이다. 개미를 관찰해 본다. 자녀를 낳아 본다. 부모를 떠나 본다. 부하 직원의 반항을 참아 본다. 경험은 하나님 사랑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암탉에 비유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예수님은 자신의 품을 원치 않는 자를 위해 죽으셨다. 암탉을 볼 때 그의 사랑과 인내가 위대해진다. 예수님은 그 품을 떠난 나도 결코 놓지 않으실 것이다.

 

개척 시작할 때 풋내기 전도사였는데, 이제 두 자녀의 아빠가 되었다.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 사랑. 도대체 아들을 어떻게 포기하나? 경험이 그 사랑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든다. 그 사랑 안에 살자.

 

[1] 경험할수록 사랑이 깊어집니다.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과 사랑을 더 깊이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신명기 32장 11-12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무엇에 비유하고 계십니까? 나의 경험을 통해 (1)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알게 되었거나 (2)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23장 37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을 무엇에 비유하고 계십니까? 품에 있고 싶지 않았던 우리를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셨습니까? 최근 경험하는 나의 일들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규모무관
(4. 7. 2024.)

시편 3:5-6

 

나이가 들어갈수록 웃음기가 사라진다. 삶의 문제의 규모들이 커져서 그렇다. 학교 미술 준비물을 안 가져 온건 괜찮다. 그러나 인생의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은 크다. 초등학교 친구 중 하나가 날 싫어하면 괜찮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날 싫다고 하면 크다. 규모가 커지면, 염려도 함께 커진다.

 

하나님은 문제의 규모와 상관없이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5-6)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온 나라가 자기를 죽이러 달려왔을 때 했던 고백이다. 천만인이라는 규모가 인상깊다. 다윗은 문제의 규모와 상관없이 편하게 잤다. 왜? 하나님은 문제의 규모와 무관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문제의 크기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만이 크신 분이기에, 그분 앞에 큰 문제는 없다. 큰 문제도 하나님 손 안에 있으며, 작은 문제 속에 하나님을 의지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풀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1) 작은 문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이 붙드시지 않으면 규모와 상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2) 큰 문제라고 위축되지 말고 담대해야 한다. 붙드시는 하나님만 계시면 규모와 상관없이 승리할 것이다. 돈의 액수가 커져도 두려워하지 말라. 갈등의 골이 깊어져도, 자녀 마음의 완고함이 깊어져 가도 담대해야 한다. 큰 문제는, 크신 하나님이 푸신다.

 

사람의 가장 큰 규모의 문제는 무엇인가? 죽는 문제다.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규모와 무관하게 나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오늘 확신해야 한다. 내가 소유한 구원은 규모에 무관한 구원이다.

 

일부러 하나님이 삶의 문제를 키우실 때, 나의 믿음도 함께 키우시는 여정이라고 생각해 보라. 작은 문제를 해결하셨던 동일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라. 내가 섬기는 나의 하나님이 훨씬 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삶의 문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삶에 대한 압박감도 커지게 됩니다. 규모가 커지면서 믿음이 위축되었던 나의 삶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재정의 규모, 질병의 규모, 갈등의 규모 …)

 

[2-3] 시편 3편 5-6절을 읽어봅시다. 다윗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규모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5장 24절을 읽어봅시다. 인생에 가장 큰 규모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요즘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나를 이끄시는, 큰 규모의 삶의 문제는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지속은 하나님께
(3. 31. 2024.)

학개 2:5

 

인생에서 제일 쉬운 것이 한 번 하는 것이다. 제일 어려운 것은? 지속하는 일이다. 결혼 생활 30년, 근속 30년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지속이 능력이라서 그렇다. 유튜브 채널 하나가 소위 ‘떡상’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추락을 준비한다고 한다. 그만큼 지속은 어렵다.

 

지속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포로귀환 이후 성전을 다시 지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개 2:5) 하나님이 계속 함께하시니, 지속할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다. 나의 판단과 성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속할 힘을 주신다.

 

하나님 없이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교만함을 버리라. 내가 만남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날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지속하게 해주셔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무 지겨운 일, 너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더라도, 하나님이 지속하게 하시면 계속 버틸 힘이 생긴다. 지속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지속할 힘이 없다. 죽음은 사람의 지속성을 영원히 빼앗아 간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영원’이라는 지속성을 주신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8:51) 이제 부활주일도 이해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지속성을 내게 주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 속에 오늘도 살 수 있다. 주님 온전히 섬길 때, 내가 지켜내야 할 것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내가 지속할 수 있다는 자만함을 버리고, 사랑도, 공부도, 사업도, 건강도, 지속하게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라. 지속은 하나님께만 있다.

 

[1] 순간적인 성공은 쉬운데, 수성하고, 버티고,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관계나 학업, 사업 등을 지속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학개 2장 5절을 읽어봅시다.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간적인 선호, 상황, 성실에 의지하여 지속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삶의 영역이 있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8장 51절을 읽어봅시다. 모든 사람의 지속성이 끊어지는 사건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지속하게 하시는 힘을 구해야 할 삶의 영역을 나누어 봅시다.

“기대와 다른 왕
(3. 24. 2024.)

요한복음 12:12-13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질 때 실망이 제일 크다. 주식과 코인이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산다. 떨어지면 실망한다. 안 오를 것이라 ‘기대하고’ 안 산다. 그때 오르면 돈을 안 잃었어도 실망한다. 기대와 다른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다른 계획을 가지고 내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오실 때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한다. 왜 환영했는가? 로마의 압제를 군사적으로 뒤엎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주실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한복음 12:12-13)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십자가에 있었다.

 

기대와 다르게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왕을 끝까지 신뢰하라. 좋은 차 타고 오실 줄 알았는데 나귀 타고 오셨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 알았지만 십자가 지시며 만왕의 왕이 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일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환호가 사라지고 조롱이 난무할 때,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졌을 때 신앙을 포기하지 말라. 끝까지 신뢰할 때 그가 주시는 구원을 누릴 수 있다.

 

내가 기대한 일들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기대하신 일들이 내 삶에 성취된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예수님이 내 인생의 가장 큰 기대, 영원에 대한 기대를 이미 다 이루신 분임을 믿는가? 그 믿음 안에서 오늘도 확신해야 한다. 내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이 내 인생에 기대하고 계신 선한 일들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움직여주는 왕을 모시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만든 왕이다. 내 기대 밖으로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기대와 다른 왕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라. 그것이 종려주일이 주는 참된 의미이다.

 

[1] 기대 때문에 실망도 커집니다. 기대와 다르게 펼쳐지는 오늘 속에 내가 실망하고 당황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기대와 다른 자녀, 성적, 업무환경, 사람 등)

 

[2-3] 요한복음 12장 12-13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하였습니까? 왜 그런 반응을 보였습니까? 인간적인 기대로 가득 찬 내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영역은 없는지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9장 30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 기대와 다른 일을 행하시면서, 어떤 일을 성취해 주셨습니까? 그 믿음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다시 소망 가운데 삶을 바라봐야 할 영역들을 나누어 봅시다.

“내가 예비한 곳
(3. 17. 2024.)

출애굽기 23:20

 

길을 잃었다는 생각은 늘 마음을 힘들게 한다. 어렸을 때는 입학, 취업, 합격 등 인생의 표지판을 따라가면 목적지에 닿을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제는 어디로 가야하지?’라는 질문에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다. 광야 길에서 모세에게 약속하신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출애굽기 23:20) 광야를 지나고 있지만, 분명 예비하신 곳에 가고 있다. 준비된 자리가 있다. 준비된 위치가 있다. 준비된 단계가 있다. 보이는 상황에 속아서 방황하며 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예비하신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이다.

 

분명한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라. 이유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목적 없이 내 마음대로 이 시간 보낼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눈에 그 길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꾸준히 묻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빠 차를 타고 처음 가는 길을 창문으로 바라보는 어린 자녀와 같다. “아빠 여긴 어디야?”, “응 조금만 가면 도착해”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길을 알아서가 아니다.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있다는 하늘 아버지를 향한 신뢰 때문이다.

 

모든 인생은 확실한 한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의 ‘영원한 방황’이다. 죽음 앞에서 방황하는 우리 인생을 대신하여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가야할 곳을 예비해 두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한복음 14:2)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의 인생에 영원한 방황이 그치게 됨을 믿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인생도 다시 확신해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지만, 분명 주님은 이 땅에서 내 삶을 향해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이끌고 계신다.

 

올 한해 나의 삶은 어떻게 될까? 분명 하나님이 예비한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어려워지는 마음들을 부여잡고, 영원히 내 삶의 여정을 붙드실 주님을 신뢰하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예비되어 있다.

 

[1] 어렸을 때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인생의 방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마음이 분주했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출애굽기 23장 20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길을 알지 못해도 내 삶의 여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인도하심이 흐릿해 진다는 이유로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잃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4장 2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겠습니까? 나누어 봅시다.

“다른 종류의 기도
(3. 10. 2024.)

마가복음 9:28-29

 

같은 영역에 있으나, 다른 수준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선릉역 앞 ‘명품수선집’. 양복 수선은 무조건 여기 가야 한다. 강화도 놀러갈 땐 ‘화목 칼국수’. 육수가 정말 끝내준다. 교회 커피 원두는 ‘챔프 커피 알리블렌딩’. 영역은 같다. 그러나 수준이 다르다. 우린 그걸 능력이라고 한다.

 

신자들의 삶에는 수준이 다른 기도를 통해 나오는 삶의 능력이 있다.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예수님이 쫓아내자, 제자들이 묻는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가복음 9:28) 예수님은 다른 종류의 기도를 소개하신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29) 제자들은 그 전에도 기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다른 능력을 보여주는, 다른 종류의 기도가 있다는 말이다.

 

삶의 더 위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을 때, 다른 종류의 기도를 시작하라. 샤워를 하며 지내지만, 목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삶의 중요하고 무거운 문제들을 두고 고민할 때, 결단해야 할 때, 돌파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맹하게 앉아있지 말고 다른 종류의 기도를 계획해보라. (1) 기도의 기간을 정해야 한다. 1주, 2주, 한달 등 먼저 기간을 정하라.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사수해야 한다.(매일 밤 10시, 매일 새벽 6시 등) (3) 기도의 양을 정하라. (30분, 1시간 등) 좀 냉정하게 말해보자. 당신이 그 문제가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계속 생각한다면, 그건 계속 늦어지거나 계속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평범하게 기도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결과도 평범할 것이다. 완전한 변화와 역전을 바란다면, 비범하게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을 이루신 마지막 방법은 기도였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십자가의 무거운 사역 뒤에는 가장 무거운 기도가 있었다. 기도의 구원이 내 삶에 임했음을 믿는가? 오늘 내 삶도 기도의 구원이 임할 것임을 기대해야 한다.

 

특별한 기도기간을 정해보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종류의 기도를 시도하라. 다른 종류의 능력이 삶에 임할 것이다.

 

[1] 같은 영역에 있지만, 다른 수준이라고 느껴져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경험했던 일상의 다른 수준의 것들(맛, 음악, 실력, 재능, 인격 등…)을 소개해 봅시다.

 

[2-3] 마가복음 9:28-29을 읽어봅시다. 제자들은 무엇을 물어봤습니까? 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거에 정해진 기도시간을 통해 새로운 삶의 장이 열렸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누가복음 22장 44절을 읽어봅시다. 십자가의 구원사역은 마지막에 무엇을 통해 이루어졌습니까? 내 인생에 하나님이 다른 종류의 기도로 부르신다고 느껴지는 기도제목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새로운 기도의 계획들도 한번 세워봅시다.

“새로운 재료의 출현
(3. 3. 2024.)

히브리서 13:8

 

오래 사귀면 결혼하기 쉽지 않다. 왜?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사람에게 실망할만한 새로운 재료들이 출현하기 때문에 그렇다. 잠깐 만난 사람은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얼굴 볼 사람들은 계속 사랑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나를 영원토록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8) 내가 어렸을 때도, 성장했을 때에도 그렇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도, 너무나 크게 무너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실망시킬만한 내 삶에 새로운 재료가 출현했을 때에도, 그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재료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감’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을 미움의 재료로 삼지 말라. 새로운 재료는 내가 더 사랑해야 할 근거가 될 뿐이다. 다정해서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생각보다 매정한 면이 있음을 발견했는가? 잘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녀가 방황을 심하게 하는가? 꼼꼼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구멍이 많은가? 내가 알게 된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재료는 자칫 잘못하면 매 순간 미움과 정죄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끊임없이 드러내셨다. 어느정도 해줬으면 받아들여야 하는데, 죽이겠다고 덤빈다. 더 극단적인 적대감이 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응하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의 마지막 날에도 동일한 사랑으로 그분이 나를 받아주실 것을 믿는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동일한 사랑 받았다면,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상대에게 실망할만한 새로운 재료를 발견했을 때, 눈빛 바뀌지 말라. 실망감 비추지 말라.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지, 동일하게 품을 수 있을지 고민해보라. 상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도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었는가? 예수님이 나를 품으셨다. 나에게 사랑하라고 주신 사람, 나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 새로운 재료는, 사랑의 재료이다.

 

[1] 오래 만난 사람에게는 실망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멀고 애매한 관계에서는 오히려 친밀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오래되고 더 깊어지며 실망감 때문에 마음이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2-3] 히브리서 13장 8절을 읽어 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타인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재료들이 쉽게 미움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는 순간들을 나누어 봅시다.

 

[4-5] 요한복음 13장 1절을 읽어봅시다. 마지막 극단의 적대감을 표출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나도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어떻게 조심하고, 어떻게 지혜롭게 대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줄일 줄 아는 사람
(2. 25. 2024.)

베드로전서 4:8

 

영향력의 시대이다. 이제 큰 기업의 광고보다 인플루언서 한 명이 물건을 홍보하는 힘이 더 크다. 작은 사건 하나가 미디어를 타면 사회 전체의 마녀사냥감이 된다. 세상은 모든 일을 키우는 데 능하다.

 

하나님은 신자를 ‘줄일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신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여러가지 갈등과 분노를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나를 거쳐가면 화가 줄어들고, 염려가 줄어들고, 갈등이 줄어들고, 문제가 줄어들어야 한다.

 

축소의 영향력을 추구하라. 증폭시키는 영향력만을 추구하지 말라.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1) 나는 요즘 회사나 가정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고, 무슨 말을 전달하고 있는가? (2) 나를 거쳐가면 상대와 내 안에 부정적인 것들이 커지는가 줄어드는가? 일을 키워서 해결하려는 사람은 초보이다.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데 일을 해결하는 사람은 고수이다. 가장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줄일 줄 아는 분이셨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우리의 죄를 단톡방에 올리지 않으셨다. 사내게시판에 폭로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쏟으심으로 ‘줄이셨다.’

 

줄이고 줄여 내 죄를 완전히 지워 버리신 그분 앞에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죄를 없애신 예수님의 권세가 내 삶에도 흐른다. 나를 만나는 사람과 문제 앞에서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 지혜로 행하라. 세상을 조용히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

 

[1] 요즘 작은 문제들이 크게 확산되는 모습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경험했던 영향력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베드로전서 4장 8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십니까? 내 삶의 여러 영역들 속에서 나를 통해서 문제가 커지거나 작아졌던 경험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골로새서 2장 14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내 삶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권세가 흐름을 믿습니까? 그 분의 방식대로 내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나누어 봅시다.

“속으로 말하는 죄
(2. 18. 2024.)

누가복음 3:8

 

사람은 연륜이 생길수록 사람들의 속마음이 읽힌다. ‘저 알바생은 분명 대충 하고 돈이나 많이 벌고 싶어 하겠지?’, ‘이 일을 시켜서 속으로 엄청 욕하고 있겠지?’ 속마음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사람의 스트레스 해소 창구가 된다.

 

하나님은 속마음을 알고 판단하시는 분이다. 세례 요한의 첫 사역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춰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누가복음 3:8) 유대인들은 속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우월하다는 자기 의에 빠져 있었다. 속마음이 바뀌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속으로 말하는 죄를 살피라. 겉으로 참고 웃는 것은 매너 있는 지성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속을 정결케 하는 것은 신자가 해야 할 일이다. 웃어주지만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 자랑하며 우월감에 만족하는 것은 마귀가 준 것이다. 내 속으로 말하는 죄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어떻게 내 속마음이 바뀌는가? 속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을 만나면 바뀐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35)” 나는 결코 마음으로부터 그 사람이 용서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음으로부터 나를 미워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셨다. 당신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확신해야 한다. 보잘 것 없고, 잘한 것 없는 내 인생을, 주님은 미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깨끗한 마음이 보이는가? 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가? 속이 깨끗하신 그 분 만날 때 비로소 내 인생도 변화의 갈망이 생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진다. 마음으로부터 깨끗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다. 내가 만나는 상대에게 매너만 선물하지 말고, 깨끗한 속마음도 선물하라. 그것이 이 시대가 찾는 깨끗함이다.

 

[1] 살아갈수록 상대의 속이 훤히 보이고, 내 속을 감추며 겉을 포장하는 지혜도 늘어만 갑니다. 상대의 더러운 속이 뻔히 보였거나, 내 안에 더러움과 악을 감추며 겉을 포장했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2-3] 누가복음 3장 8절을 읽어봅시다.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하며 처음 지적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기준을 핑계로 내 속마음을 정당화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4-5] 마태복음 18장 35절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 속마음은 언제 변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진실된 마음을 경험하거나 느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나도 이 땅에서 속이 깨끗한 자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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